콜린 듀리에즈 , 『루이스와 톨킨: 우정의 선물』, 홍성사, 2005
1929년 유신론으로 회심한 직후, 루이스는 <예기치 못한 기쁨>의 초벌 작품에 해당하는 영적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글의 목적은 자신이 경험한 기쁨의 중요성과 그에 따른 채울 길 없는 갈망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미완성 자서전은 유신론을 받아들인 이후 루이스의 자기 분석을 보여 준다. (89)
회심과 함께 루이스는 유물론과 관념론이 낳은 거대한 비인격적 체계들을 거부했다. 그는 개별적인 장소와 사람들, 계절과 시간, 분위기와 기분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존재보다도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한 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복음서의 기록들은 인간 이야기와 신화 창조의 전형이자 놀라울 만큼 역사적으로 정확했고, 모든 내용이 사실이면서도 기쁨을 낳는 신화의 특성을 잃지 않았다. 따라서 복음서 이야기는 상상과 이성적 차원 모두에서 반응을 요구했다. (99)
잉클링즈는 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모두는 이런저런 식으로 당시 그곳의 기독교회에 불만을 품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잉클링즈 회원들의 정직한 상호 비평을 통해 다듬어진 많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그들의 모임은 그 후로도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톨킨과 루이스 모두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43)
톨킨은 루이스의 대중 신학자 노릇에 대해 아주 못마땅해했다. 톨킨은 가톨릭 신자답게 그런 역할은 전문 성직자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
루이스와 톨킨의 우정은 1925년 리즈 대학 교수로 있던 톨킨이 옥스퍼드 대학으로 옮겼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의 우정은, 우정이 정말 그렇게 끝나는 것이라면, 1963년 11월 루이스의 죽음으로 끝났다… 둘의 우정은 상당 부분 잉클링즈라는 모임을 통해 펼쳐졌다… 톨킨의 신앙은 루이스에게 근본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톨킨은 무신론자였던 루이스가 하나님을 찾도록 도왔다. 톨킨은 복음서의 이야기들에는 상상력과 지성을 모두 동원해서 반응해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춰 전력을 다해 루이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톨킨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톨킨이 뉴먼 추기경의 막강한 영향에 따라 유일한 정통 교회로 믿은 로마가톨릭에 귀의하지는 않았다. (271-273)
톨킨은 루이스가 죽은 지 2년 후 쓴 편지에서 이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갚을 길 없는 큰 빚을 졋습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영향이 아니라 아낌없는 격려였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나의 유일한 청중이었지요. 내 글이 개인적 취미 이상의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오로지 루이스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관심과 다음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재촉이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반지의 제왕>을 끝마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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