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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신학주제/06-1 공동체

디트리히 본 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십자가 아래 있는 형제만이 나의 고백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by growingseed 2016. 7. 9.

디트리히 본 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9

Dietrich Bonhoeffer, Gemeisame Leben, 1938

 

내가 본회퍼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물론 그의 신학 때문이 아니고 그 같은 생애 때문이었다. 우리와 같은 너무나도 어려운 가운데서 그렇게도 뜨겁게 동족을 사랑하고 그렇게도 투철하게 신앙으로 살아간 그의 모습이 내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9, 문익환)

 

그에게서 교회는 사귐으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였다... 본회퍼에게서는 그리스도는 성도의 사귐 속에서 실제로 체험되는 분이었다. (12, 문익환)

 

다른 그리스도인이 몸으로 옆에 함께 있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입니다. (22)

 

하나님께서 보이는 사귐을 선물로 어느 정도 주시느냐는 것은 다 같지 않습니다. (23)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사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것을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그 이상일수도 없고 그 이하일 수도 없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2:14)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전에 택함을 받았고, 시간 안에서 용납되고,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24)

 

2:14; 살전 4:9, 10; 15:7; 1:14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형제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서만 서로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것 이상 무엇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사귐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데서 찾지 못한 어떤 특별한 사귐을 경험해 보고 싶은데 지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29-30)

 

첫째, 그리스도인 형제의 사귐은 이상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한 현실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 형제의 사귐은 심적 현실이 아니고 영적인 현실입니다. (31)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공동 생활에 뛰어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흔히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주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이 같은 모든 꿈을 금방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은 감정을 흥분시키는 하나님이 아니고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유쾌하지도 못하고 좋지도 못한 일들이 생겨서 몹시 환멸을 느끼게 할 때에 비로소 그 사귐은 하나님 앞에서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주신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게 됩니다. 개인들이나 사귐에 대해서 빨리 실망하게 되면 될수록 개인을 위해서나 사귐을 위해서 그만큼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환멸을 감당해 낼 수 없어서 마땅히 깨어져야 할 인간의 희망에서 솟아난 꿈에 그대로 집착해 있다면, 그 사귐은 바로 그 때에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허락하시는 약속을 영영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보다도 사귐에 대한 자기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본래 뜻하는 바가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31-32)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사귐을 위한 유일한 터를 놓아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33)

 

요일 1:5, 7 7:21 고전 13:3

 

사람의 자연적인 사랑은 진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오히려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스도가 사랑을 위해서 사귐을 지속하라고 하실 때에만 나는 그 사귐을 지속합니다. 또한 그의 진리가 사랑을 위해서 사귐을 끊을 것을 명령할 때에는 끊을 따름입니다.. (42)

 

내가 내 형제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훨씬 전에 그리스도가 이미 그를 위해 결정적인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형제를 그리스도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43)

 

함께 모이는 경건한 모임에서 시편의 기도를 드리는 외에 구약과 신약을 오래 읽는 일이 빠질 수 없습니다. (64-65)

 

5:16

 

서로 죄를 고백하라. 자기의 죄와 더불어 홀로 지내는 사람은 완전히 고독한 사람입니다. (141)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사귐에 이르는 길이 뚫립니다... 죄는 사람을 사귐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 형제 앞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자기를 옳다고 주장하는 마지막 아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털어 놓아 고백한 죄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죄로 드러나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미 사귐을 깨뜨릴 힘을 잃은 것입니다. (144-145)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의 죄를 보고 두려워 떨어 본 일이 있는 사람은 형제의 어떤 무서운 죄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형제만이 나의 고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인생의 경험이 아니라 십자가의 경험이 우리로 형제의 고백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152-153)

 

(심리분석가는) 인간의 어려움과 약함과 무력함은 알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의 문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만 멸망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용서받지 않고서는 나을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심리 분석가 앞에서 나는 병자일 따름이지만, 그리스도인 형제 앞에서 나는 죄인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리 분석가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보지만, 나의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하시면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는 것입니다. (153-154)

 

함께 성찬을 받기 전 날에 한 사귐에 속하는 형제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지난 날의 잘못을 서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같이 형제들끼리 마음을 여는 일을 꺼리고서는 주의 식탁에 나아갈 준비를 갖출 수 없습니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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