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 레이머, 『예수를 따르는 베트남의 그리스도인』, 로뎀북스, 2012
베트남을 방문하며 이 나라의 기독교 역사가 궁금했었는데, 초기 선교 역사에서부터 베트남 전쟁을 전후해 베트남 교회가 겪었던 고난과 성장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이 공산화된 1975년 이후 암흑의 십년이라 불리는 기간 고문과 투옥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킨 남부 교인들과 소수부족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도전이 되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기간 목숨을 잃었던 선교사들과 동역자들의 주검을 수습하며 어두운 시간을 통과해 온 저자와 다른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마음이 아팠다. 순교와 희생을 통해 뿌리 내린 베트남 교회의 신앙 유산을 헤아리게 되었다.
처소 교회들의 성장도 놀라웠다. 모든 교회들이 문을 닫고 그리스도인들이 숙청되는 북한의 공산화와는 달리 무자비한 학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베트남 공산주의 치하 종교 활동들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던 것 같다.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즈가 75년부터 79년까지 잔인한 대량학살을 벌였음을 생각하면, 베트남이 당시 전후 복구와 사회 통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핍박의 결이 다소 달랐고, 또 해외 기독교계와도 어느 정도 연결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6)”
1. 동역자들의 죽음
나는 1966년 12월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베트남에 선교사로 갔는데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격렬해지고 있을 때였다. 그 후 일 년이 조금 넘은 68년 구정 때에 있었던 공산군의 뗏공격으로 중부고원의 반메뚜엇에 있던 동료 선교사 여섯 명이 죽음을 당했다. 우리는 그 중 세 명을 살해된 장소에 묻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따르는 대가가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그 암울한 시기에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2. 차별받고 있는 소수부족 그리스도인
일당 독재 속에서 아직도 거칠게 차별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베트남의 소수부족은 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지만 개신교 신자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중부 고원지대 산족들 40만명이 1930년대 처음 기독교가 들어 온 이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북서부 산지 지역, 중국과 라오스를 국경으로 하고 있는 지역에서 35만명의 소수부족민, 그 중 가장 큰 흐몽족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코호 부족의 교회 탄생을 다룬 '대나무 십자가' (Dowdy 1964))
3. 최근까지 이어온 핍박
2009년 11월 한 순회 전도자가 디엔비엔동 현 흐몽족 영 가정을 믿음으로 인도했다. 지역 관리들은 이 가정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만약 새 종교를 버리지 않으면 벌금을 많이 내야 하고 큰 해가 미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일곱 가정은 신앙을 포기했다. 그 해 12월 1일에 공안들은 믿지 않는 주민들을 선동하여 새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세 가족에게 돌을 던지고 구타하도록 하였다.
4. 베트남의 토착 종교와 조상 숭배
베트남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이 종교성을 쓸어버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조상숭배는 베트남 전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는 종교적 의식이다. 인간은 세 개의 혼과 아홉 개의 영이 있다고 믿는다. 죽을 때 버려진 혼들은 악한 영이 되어 떠돌아 다닌다고 믿는다. 베트남의 토착 종교 : 까오다이교, 1920년 창시자 응오반찌에우에 의해 시작, 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기독교 등 존재하는 종교들의 합성. 정부 통계 230만명의 신자 추정. 메콩 델타 지역의 화하오교, 1930년대 불교 개혁 운동에서 시작, 반공 사상. 정부 통계 130만명.
5. 초기 천주교 선교
1615년 일본에서 쫓겨 난 몇 명의 예수회 신부들이 다낭 시가 있는 곳에 선교회를 세움. 1627년 로데 신부가 톤낀, 북부 베트남에 두 번째 선교회를 세움. 표의문자를 고안. 신앙을 버리도록 심한 핍박을 받은 천주교 신자들.
6. 초기 기독교 선교
영국 해외 성서공회(BFBS) 일원을 통해 1890년 성경의 일부가 처음으로 베트남어로 번역. C&MA는 1911년 영국 성서 공회 보넷 선교사를 통해서 들어 옴. 중국에서 사역한 C&MA 선교사 R.A.Jaffray 가 다낭에서 선교 시작. 자립, 자치, 자전 선교 정책. 초기 선교사들은 모두 프랑스 식민지 관리들과 개신교를 이단으로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신부들의 노골적인 적개심을 극복해야 했다. 1921년부터 1940년까지 20년 동안 2만명이 넘는 신자들이 세례를 받고 자립된 교회들이 많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베트남인 선교사들을 소수부족이 사는 산지로 파송하였다.
북부의 톤낀, 중부의 안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라고 불리는 지역에 따라서 교회 성장은 큰 차이를 보였다. 프랑스가 세 지역에 각각 다른 정책을 폈고, 종교와 선교의 자유도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부의 코친차이나 지역은 전부 프랑스의 소유로 간주되었다. 중부의 안남지역은 다낭시만, 그리고 북부 톤낀 지역은 하이퐁과 하노이 시만 프랑스의 소유로 여기고 있었다. 1928년에는 중부 안남 지역에 천주교 외 복음 전파를 견제하는 엄한 조치가 취해졌다. 1935년에야 개신교에 대한 모든 통제는 천주교가 강했던 북부의 톤낀 지역에서도 중지되었다. 선교사들은 이제야 종교의 자유가 왔다고 간주했다.
7. 존 성
다가오는 전쟁과 시련을 대비라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베트남 교회에 크게 임하셔서 1938년 대부흥을 주셨다. 중국의 부흥사 존 성. 베트남 신자들 가운데 전도를 위한 열심히 새롭게 일어났다.
8. 전쟁 속 베트남 교회
(1) 일본의 점령 (1941-1945), 일본은 모든 외국인들의 선교 활동을 전면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남부 베트남 선교사들을 모두 중부 달랏으로 모이게 했다. (2) 독립전쟁 (1945-1954) 2차 대전 후 일본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약해진 틈을 타서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언했다. 프랑스와 울맹군의 싸움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사기가 떨어진 프랑스의 항복으로 종말을 짓게 되었다. 베트남은 위로 17도선에서 분할되었다. 민족주의의의 부상으로 신앙을 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나라의 분열은 복음 성회를 남부와 북부로 나뉘게 했다. 일본 패망 후 선교활동은 프랑스 관리 지역에 한정이 되었고, 교회의 자립을 유도할 목적으로 경제적 후원을 줄였는데 그로 인해 교회와 선교사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3) 1964년 톤낀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베트남의 내분에 개입한다. 현 베트남 역사는 이 전쟁을 미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1973년 미군은 완전 철수를 경정하였으나 월맹은 전쟁을 중지하지 않고 1975년 4월 30일 월남 정부를 항복시켰다. 이후 10년동안 베트남은 두꺼운 죽의 장막으로 가려졌다. 패망한 월남 정부의 군인들과 관료들 수십만명이 재교육 캠프에 보내져 순화 교육을 받았다. 이들 중 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비록 대량학살은 없었지만 수천 명이 그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호된 훈련 때문에 죽어갔다. 교회는 계속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선교사들에게 의존도가 강하던 작은 교단들은 조직이 약화되어 사라져갔다. 남아 있는 교인들은 대부분 복음 성회 교회들로 옮겨갔다. 중부고원지역의 소수민족 교회들을 완전히 없앴다. 키질과 정화의 시기였다. 개신교의 경우 약 300군데의 자산이 압수되었다.
9. 처소교회 운동
1984년 도이모이 경제개방 정책. 베트남 남부 복음성회 리더십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부의 정책을 따라가야 한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취했다. 오순절과 성령파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이미 모이던 가정 모임들이 자연적으로 처소교회들로 변했다. 2009년 통계, 2,500개 처소에 25만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외부재정지원에 의존되고 그에 따라 교단의 분리 성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VEF는 29개 처소교회 교단과 함께 연합하고 있고, 북부 처소교회들은 하노이를 중심으로 HCF 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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