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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영성기도

스코트 해프먼, 『온전한 신뢰』, 고통과 악이 왜 존재하는가

by growingseed 2021. 6. 15.

스코트 해프먼, 온전한 신뢰, 강봉재 옮김, IVP, 2006

cott, J. Hafemann, The God of Promise and the Life of Faith, Crossway Books, 2005

출처: https://growingbooks.tistory.com/entry/스코트-해프먼-『온전한-신뢰』-우리는-왜-존재하는가 [아빠의 서재]

6. 이 세상은 왜 고통과 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세상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온통 문제투성이로구나. 어떤 열등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기에 힘이 달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알프레드 테니슨, Alfred, Tennyson)

1. 인간의 자유 의지 (열린 신론):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을 자유롭고 스스로 결정하는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능력 행사를 제한하셨다.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이 자유롭게 죄를 선택한 결과, 이 세상에 고난이 생긴 것이다. 결국 이 세상에 악이 출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자유 의지 때문이다. 그레그 보이드 (Greg Boyd)악이 출현할 잠재적 가능성은 자유 의지의 본성에 놓여 있다.” 말하며, “죄와 저주가 현존한다는 사실은, 바꿔 말해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라고 결론 내린다.

인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악이 출현하더라도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또한 사랑의 표현이 된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해 주기 때문이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 행사를 스스로 제한하셨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사랑이 생겨난다고 가정한다. (180-182)

2. 과정 신학: 하나님은 본래 유한한 존재이시기에 창조 세계와 마찬가지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을 겪으신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영향을 받으신다. 과정 신학의 하나님은 인류의 앞날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의 협조가 없으면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날을 인간에게 위탁하신다고 본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fred North Whitehead)의 말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 또한 하나님을 창조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결정한다. 과정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유한하면서도 일시적인 본성이 결합될 때 비로소 악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랍비 해롤드 쿠쉬너(Harold Kushner)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에서, 고난의 한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아니라 정의의 하나님이 무능하기는 해도 불행이 닥칠 때 여전히 우리 편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악의 문제에 답하고자 할 때, 아르미니우스 자유의지론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시지 않지만 그것을 예지하신다.), 열린 신론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예지하실 수 없다.), 과정신학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실 수 없거나 예측하실 수 없다)은 하나님이라는 궁극적이며 전능한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나같이 배격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 곁에 오셔서 공감하시겠지만 고통을 다스리시지는 않는다.

3.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 가운데 적극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시며 친히 개입하신다고 가르친다. 모든 인간의 궁극적 운명은 자신의 주권적 섭리에 따라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또한 악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악을 일으키시는 장본인이 결코 아니시다. (악은 하나님과 그 분의 모든 선함과 주권에 대한 반역이다.)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은) 사단의 유혹에 타락과 저주를 자초한 인간과 궁극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세상에 악이 만연한 까닭은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원대한 계획 가운데 악을 포함시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의 규모와 목적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실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탄이 욥을 직접 괴롭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허락과 제한에 따라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45:7). 하나님은 사탄의 전략과 범위를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1:13). 하나님은 사탄의 계획까지 통제하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믿음을 파멸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일련의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고 해서 악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언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축소한다고 해서 악의 문제가 더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정 이입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일은, 세상의 악을 저지않고 외면하며, 하나님을 속수무책으로 만들고, 고통의 목적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이 엄습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어쩌다가 우리가 잘못된 상황에 처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다가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은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명하신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어떤 목적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어떤 상황에서는 그 분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193-194)

바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고통으로 이끄시며, 고통 받는 중에도 지켜 주시며, 고통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모든 것이 그 분 자신의 영광으로 귀착되며 이것은 동시에 그분의 백성들의 영원한 선이 된다. (고후 1:9; 2:14; 4:13-18; 12:9-10). 하나님이 고통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면, 고통 가운데 위로 또한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악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하나님의 주권을 축소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고통에 숨겨진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고후 1:3-11) 따라서 삶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본질적 부분은, 그리스도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을 만들어 그 분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악은 악일 뿐 변장한 선이 아니다. 세상은 인간의 변덕, 무지, 혹은 정치적 의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195-196)

성경은 어떤 형태의 고난이든 고난 자체를 결코 미화하지 않는다. 고난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고난은 타락한 세상에서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의 필수 요소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14:22)

그리스도인들은 무언가를 기대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8:18-25) 악한 세상에서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 (벧전 3:14-17) 세상의 빛이 되라는 부르심 속에서 고난을 받는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 4:12-16)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받는 고난을 무익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 분이 고난 가운데 보여 주신 믿음의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본받아야 할 전형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받으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그 분의 제자로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된다.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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