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01 복음전도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by growingseed 2004. 5. 13.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C. S. 루이스(1898-1963)/ 장경철, 이종태 옮김/ 홍성사

(1) 
1, 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기독교 사회 속, 그러나 복음이 없어 공허한 동시대인들에게 자연법에 근거한 변증을 통해 하나님을 호소력있게 전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편안했던 것은 자연법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가졌던 물음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자연법을 가진 논증이 아직 유효한가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내 안의 도덕률이 여러 가지 장치들로 부정되어지는 의심의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고민이다. 이 부분을 제외한 기독교 윤리 이후 부분은 상세히 읽지 못했다. 

(2) 서론 

(2-1) 그가 느낀 필요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 믿지 않는 이웃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 그리고 아마도 유일한 봉사는 모든 시대에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바를 설명하고 수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놓은 문제들은 고도로 신학적인 논점이나 교회사적인 논점들과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아서, 진짜 전문가 외에는 다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러한 논쟁거리들을 놓고 토론하는 일은 불신자를 그리스도인의 울타리 안으로 이끌어오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말하고 쓰는 한 불신자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는커녕 그 어떤 공동체에도 발디딜 엄두조차 못 내게 되기가 쉽습니다. 

(2-2) 순전한 기독교
기독교에서 이러저러한 논쟁점들을 다 빼버리고 나면 그저 막연하고 생기없는 최대공약수만 남을 것이라는 견해를 잠재우는 데 일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최대공약수는 명확할 뿐 아니라 예리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기독교 세계 내부에 아무리 극심한 분열이 있다 해도 이 최대공약수와 비기독교적인 신념들 사이에 있는 간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 것입니다. 

(2-3) 타협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의 정의 
언어가 가져야 할 명확한 의미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사라는 말이 본래는 문장을 수놓은 외투를 입고 다니며 상당한 땅을 소유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었다. 존은 거짓말 쟁이 신사다. 라는 말에도 하등 모순이 없었다. 그러나 신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문장이나 소유한 땅이 아니라 행실이 아니겠느냐 하는 지극히 옳고 좋은 의도이지만 유용성을 잃어버린 의견은 언어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교한 새 의미에서 어떤 사람을 신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그에 대한 정보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 그를 칭찬하는 방식이 되고 만 것이다. 화자가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저 화자의 태도만을 알려주는데 그치고 만다. 신사라는 말은 예전의 객관적인 의미를 잃고 화자가 좋아하는 사람 이상을 뜻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단어 말고도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는 말들이 이미 있으니 이런 용도를 위해 이 말을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이러므로 그 단어는 유용성을 잃고 의미가 손상되었다." 안디옥에서 처음 사용된 "그리스도인" 이란 단어의 고유성. 기독교의 공통되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밖에 사용할 수 없다. 

(2-4) 그의 의도 
순전한 기독교는 현관 마루에 비유할 수 있어, 여기에서 기다리고 문을 열어보지만 방에 들어가 삶을 살아야 한다. 

(3)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인간의 삶에서 마주치는 도덕적 기준이 어떻게 하나님께 인도하는지.

(3-1) 인간 본성의 법칙, 자연법의 존재를 쉬운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도덕률의 자연발생론, 인간집단의 본능에 불과하다는 논리에 반대하여 본능과 달리 존재하고 있는 도덕률을 설명한다. 지식의 진보와 도덕적인 진보에의 차이를 거론하며 도덕적인 원칙은 변함이 없음을 통해 이 법칙의 유일성을 증명한다. 이 법칙의 실재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 '나'라는 인간을 열어 보았을 때 내가 발견한 것은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떤 법칙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 즉 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려고 한 노력들이 현대를 이해할 수 있는 코드가 될 것 같다. 푸코의 사회학과 니체의 초인론은 이제 일반인들에게도 평범한 사고가 되어버렸다. 

(3-2)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도덕률 배후에 있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대한 이해. 그가 만든 우주, 그가 우리의 정신 안에 둔 도덕률. 이로써 그가 선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인격적인 존재이거나 비인격적인 절대 선일 수 있다. 그것이 어떻건 우리는 끔찍한 곤경에 처해 있다.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고 다음날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기미 또한 전혀 없으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이다. 몸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4)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범신론과 이원론의 오해를 넘어 기독교가 선언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침공하시며 찾아오시는 분이신지. 

(4-1)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모든 종교에는 '부분적인' 진실이 있다. 인류는 신의 존재를 믿는 다수와 믿지 않는 소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현대 서구 유럽의 유물론자들이 이 소수에 속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을 다시 나누면 신을 선악의 구분 너머의 존재로 보는 범신론-헤겔과 힌두교도들이 가진 관점이다- 과 신은 분명히 선한 존재 내지는 의로운 존재로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가지고 있고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범신론은 우주 자체를 신과 동일시하면서 우주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신의 일부라고 하는데서 기독교와 다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진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으며 그것이 잘못되어 버렸다고 선포한다. 선한 하나님을 반대하는 논거 중 세상이 불의하다는 것은, 도리어 정의와 불의의 개념이 실재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정의에 대한 나의 개념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라는 포스트 모던적인 도피가 언급되고 있으나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침공: 충격적인 갈림길: 예수-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완전한 참회: 실제적인 결론: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때문이다. 

(5) 그리스도인의 행동
기독교 윤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도덕의 세 요소: 기본 덕목: 사회도덕: "사람은 가르쳐야 할 때보다 기억시켜야 할 때가 더 많다. (Samuel Johnson)" 도덕과 정신분석: 성도덕: 그리스도인의 결혼: 용서: 가장 큰 죄:-교만 사랑: 소망: 믿음:

(6)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 걸음
삼위일체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한복판에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인지. 

만드는 것과 낳는 것: 삼위이신 하나님: 시간과 시간 너머: 좋은 전염: 고집센 장난감 병정들: 두 가지 부연 설명: 가장합시다: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 대가를 계산하기: 호감주는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 새 사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