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인 편저, 『캄보디아 격동의 100년사』, 문예림, 2008
인용과 출처를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아쉽다. 폴포트 (사롯 사)의 성장배경과 프랑스에서의 공산주의 접촉, 호치민이 결성했던 인도차이나 공산당, 교직생활, 크메르 인민혁명당 활동 등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사진 자료들이 많다.
1976년 8월 21일, 폴 폿은 당 중앙 위원회를 소집하여 농업, 산업, 보건 및 복지, 문교 그리고 기타 각 분야에 걸친 사회주의 건설 4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1977년부터 집행하기로 하였다... 4개년 계획의 기본 취지는 4년 이내에 영농 및 산업의 전체 집단화를 실시하여 농산물을 생산, 수출하고 그 수익으로 다시 영농 및 경공업에 재투자를 하여 궁극적으로는 중공업까지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화폐제도, 시장제도 그리고 사유재산제도 일체를 없애버린 그들이 이제 자본 축적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274)
캄보디아는 수출할만한 지하자원이 없었고,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이 부족하였고, 기술을 가진 자들은 극히 부족하였다... 부존자원의 부족한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벼농사가 4개년 계획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헥타 당 3톤의 쌀 생산'을 국가적인 목표로 부르짖었다... 1970년 이전에 캄보디아 쌀 생산량은 도정 이전의 벼로도 헥타 당 1톤을 미치지 못했다. 혁명조직은 순간적으로 3배 이상을 생산하라는 요구를 한 것인데 그렇다고 특별한 영농 기술이나 품종 개량, 장비 등이 지원된 것도 아니었다... 혹독한 노동으로 벼농사를 짓고, 수로를 파고, 댐을 쌓고 밀림을 개간하여야 했다. 그 중 수십만명이 영양실조, 질병, 처형 그리고 과로로 죽어갔다. 인적손실이 보고 되어도... '적'들이 제거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적으로 간주되는 새 인민들은 우선 숫자가 너무 많았고, 또 철저한 계급 투쟁의 대상이었으므로 소모되어야 했다. (278-280)
1976-1977년 벼 생산은 목표량을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농민들 자체 식량으로 보관한 쌀가지 잉여생산량이라고 하며 당의 간부들이 가져갔고, 상당량은 중국으로 수출하여, 결국 1976년 극심한 영양 실조로 죽고, 나머지도 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비록 생산이 줄어들고 농민들이 죽어가도 보고서에는 항상 좋은 것만을 나열하여 스스로 현실을 볼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280-281)
지도층은 산업분야에 무지하였고 저문가의 등용이나 자문을 받는 것조차 거부하였으니 실패할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북한이 과거 론놀 공화국 시절 세워진 공장을 재정비해 주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끼리롬 수력 발전소도 이 때 북한이 다시 수리해 주었다... 보건복지 분야는 전통 민간 요법을 장려했다. 3천여명의 의사, 간호사들은 50여명만 남기고 다 죽였기 때문에 근대 의학은 운운할 처지가 못 되었다.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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