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벡홍 그는 라이프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캄보디아에서 저명한 목회자이다. 그의 설교를 유튜브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가 크메르루즈 기간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미처 모르고 있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대학생 선교단체 간사 훈련을 마치고 온 부부는 다가오는 위협 앞에서 조국을 떠나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 갓 태어난 아기의 생명을 두고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다. 끔찍한 학살과 폭력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그것을 분별하며 따라 살았던 이 짧은 기록은, 사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을 두려움과 죽음의 위협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담담하게 쓰여진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매일 이 곳 선교지에서 복음을 위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묻게 한다. 죽음보다 더 큰 가치, 생명을 내어 놓고 달음질해야 복음은 그렇게 값진 것이라는 것을 다시 되새긴다. 매일 기도하며 응답하심을 경험하고 지금 부르심을 거룩함으로 떨며 순종하기를 기도한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학생들을 제자들로 세우고자 더 뜨겁게 타오르길 기도한다.
탕벡홍, 『킬링필드 위의 사랑』, 이영철 옮김, 한국가정상담연구소, 2004
Ordeal in Cambodia: One Family's Survival-Escape from the Khmer Rouge
A True Story by Vek Houng Taing as told to Sharon Fischer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 프놈펜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함락되었다. 캄보디아 수도의 항복은 농촌으로부터 시작된 5년 동안 전국에 밀어닥친 내란인 게릴라 운동의 최종 승리의 신호였다. (16)
우리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간사로서의 훈련을 마치고 7개월 먼저 프놈펜에 막 귀국했다. 우리는 매우 불안한 상황 속에서 귀국하는 것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민족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불타올라 있었다. 우리는 내가 일년 전에 졸업한 프놈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학생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학생들에게 영적인 지도를 하기 위해서 매일 캠퍼스에 나갔다. 전쟁이 그렇게 크게 움직이기 전 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많은 학생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8)
3월이 시작되면서 사실상 정부의 최고 관리들은 도시에서 전쟁이 나기 전에 프놈펜을 떠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염려를 염두해 아내 사모엔과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우리가 근심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다. 이 일이 비록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캄보디아에 남기로 결정하였다. (19)
1975년 4월 7일 나는 캄보디아에 머물기로 한 결정을 알리기 위해서 마닐라에 있는 CCC 아시아 책임자였던 베일리 막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20)
친애하는 베일리 막스씨
먼저 이렇게 서투른 글씨로 급히 흘려 쓰게 된 것에 대해서 사과를 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이틀에 두 세시간 정도만 전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전동타자기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사립학교 등 모든 학교가 문을 닫았습니다. 상황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음주 아니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든지 죽든지 행복합니다. 우리는 캄보디아에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삶의 최후가 되는 마지막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힘을 주시도록 계속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기 전에 당신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만약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사랑하는 CCC 모든 간사님들에게 우리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두에게 홍, 사모엔, 아기가 (20)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렸고, 만약에 우리의 모든 것들이 빼앗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분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43)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그 분의 계획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고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였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46)
그러나 두 달이 자나고부터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감소시키시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콕 트롬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음을 인식하였다. 분명 우리에게도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50)
우리는 완전히 젖은대다 피곤하고 춥고 배가 고팠지만 이 비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마철에는 소낙비가 굉장히 많이 내리기 때문에 거의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소낙비가 우리를 찾으려고 오는 크메루즈 군인들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54)
우리에게 크앙을 보내주시고, 마오와 만나도록 하기 위해 기차역가지 우리의 도착을 준비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은 참으로 정확한 장소와 때에 적당한 사람을 보내주시는 앞선 계획을 가지신 분이었다. (59)
우리에게 주는 적은 양의 쌀 배급 또한 우리의 생각을 낙담시키기 위한 하나의 목적이기도 하였다. (61)
어린 공산주의 군인들은 의심없이 무조건 명령에 따르는 것을 빠르게 배웠다. (62)
고발된 사람들은 마을에서 이주일에 한 번 있는 코상이라는 저녁 모임에 이끌려 온다. 여기에서 그 사람의 죄가 공표되고 그는 그의 유죄를 인정하게 된다... 노레아에서의 처형은 가까운 강둑에서 실행되었다. (68)
그러나 우리가 낭 부인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녀는 매우 화를 냈다. 우리를 구해주기 위해 책임을 다했던 것은 자기인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74)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계속해서 사모엔은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엔에게 이야기를 했다. (84)
1978년 12월말에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략했다. (88)
나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당신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래요. 그날 밤 엔 그리고 한 미망인과 그녀의 18살된 딸이 그들의 삶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91)
크메루즈하에서의 4년동안 나는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대한 그 분의 품성에 견고한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이 나의 한 걸ㅇ므 한 걸음 인도하시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21)
하나님께서 크메루즈 하의 캄보디아 생활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을 잊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124)
1991년 9월. 캄보디아의 문이 열리자 그는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프놈펜에서 뉴 라이프 교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지역 교회를 세우며 캄보디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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