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되는 선교』, 캄보디아의 일본인
나는 나고야의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열여섯살 때 교회의 학생 캠프를 통해서 크리스천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내가 정말로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를 참으로 알고 싶어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임에서 좋은 크리스천 친구들과 KGK 간사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나를 가르쳐 주었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격려했다. / 대학교 3학년 때 KGK에서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것을 보기 위해 태국 여행을 준비했다. 마키노 부부는 그 당시에 OMF 선교사로 태국 기독교 학생 사역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인도하여 방콕과 치앙마이에서 다른 학생 그룹들을 볼 수 있도록 안내했다. OMF 선교사들이 태국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를 보고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 졸업한 후 나는 공립고등학교에서 4년동안 영어를 가르쳤다. 교사가 된 지 4년째 되는 해에 하나님께서 마가복음 8장 34-35절을 통해서 그 분께 내 생애를 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싱가포르 제자 훈련 센터 (DTC)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한 선교사가 나에게 캄보디아에서 일하도록 도전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캄보디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크메르루주 정권이 통치했는데, 그동안에 거의 170만 명의 자국민이 살해당했거나 죽었고 기독교인은 약 90%가 말살당했다. 그 정권은 지식인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대적하는 해로운 견해나 사상을 퍼뜨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10년이나 15년 동안은 캄보디아에서 젊은 학생들이 삶의 올바른 기초를 놓고 또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회복하도록 돕는 학생 사역이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95년 11월 우리는 프놈펜에 살기 시작했다. OMF가 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었기 때문에 당시 OMF 팀은 규모가 매우 작았다. 우리 현지 책임자는 나라밖에 있었고, 우리 자신의 선교 거점이 없었다. 우리는 고참 여선교사인 앨리스 컴페인에게서 컴보디아어를 배웠다. 언어를 배우는 적당한 체계도 없었다. / 태국 OMF 선교사 나린과 윌라이트 스리탄돈이 포첸통에서 개척한 교회를 돕도록 배치되었다. 나는 그 교회와 프놈펜 왕립 대학의 철학과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이 경험들을 통해서 교회에서는 캄보디아 기독교인들을, 대학에서는 비기독교인 학생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감사했다. / 1997년 7월 프놈펜에서 쿠데타가 있었다...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당시에 아이작 스코트 은퇴 선교사가 새 OMF 선교본부의 책임자였다. 그는 현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선교사들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팀에 그 분이 계셔서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점차적으로 요코와 나는 캄보디아 학생들이 매일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가난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좋은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공무원의 한 달 월급은 15-20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이웃 여학생은 거리에서 모터 자전거를 빼앗기지 않으려다가 강도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아마도 캄보디아 학생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기초 교육의 부재였고 훌륭한 캄보디아인 대학 강사들의 부족이었다. (65)
1995년 5월, FES 가 주관하여 첫 번째 학생 캠프가 열렸다. 그 열매로 한 칠리핀 치과 의사와 한 캄보디아 치과의사가 치대에서 기독 학생 소그룹을 시작했다. ... 건물은 너무 낡았고 치과 기구들은 굉장히 원시적이었다. 그보다 더한 충격은 같은 그룹 학생들이 서로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은 슬픔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당시 캄보디아인들 사이에는 상호 불신과 의심이 매우 심했다. 나는 범교단 학생 사역인 FES를 형성하여 학생 모임을 시작하기 위해 교회와 기독교 기숙사들을 여러 군데 방문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캄보디아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계급 조직을 가진 단체 구조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FES와 같은 단체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FES 는 강한 지도자 없이 학생들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단체였다. 게다가 선교사들은 대개 캄보디아인 지도자들이 다른 그룹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 캠프나 성경 공부를 도와주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급료를 주지 않는 것을 알고, 많은 학생들이 우리 그룹을 떠났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우리는 태국, 홍콩, 말레이시아 그리고 싱가포르에 있는 다른 FES 그룹들의 도움을 받아 정기적으로 학생 캠프들을 열었다. 얼마간의 학생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어떤 학생들은 더 공부하기 위해 해외로 떠났다. (66) / 캄보디아의 많은 민속 설화들은 도덕적인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다. 대개는 이야기 끝에 한 두 줄의 도덕적 가르침이 있다. 그가 캄보디아인들이 이야기를 읽는 식으로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캄보디아 학생들은 매우 독창적이다... 아주 작은 방에 네 다섯명의 학생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작은 방에 커다란 칠판이 있었다. 각 학생이 다른 학과에서 다른 과목을 배웠다. 그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각자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른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런 식으로 하여 대학생들로서 더 넓은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왔다. (67)
학생들을 사랑하는 다른 OMF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다. OMF 학생 사역팀은 2001년부터 시작했다. 학생 사역자들과 대학 강사들이 캄보디아 학생들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것이 우리의 아이디어였다. 선교사인 강사들은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학생 사역자들은 학생들을 만나서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하거나 일대일 제자 훈련을 한다. 대학생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서로 잘 보완하며 일할 수 있었다. (67) / 상 부부와 캄보디아 학생들과 졸업생들을 지도하던 다른 OMF 선교사들의 지도력 덕분에 캄보디아 FES는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더 이상 FES와 연관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두 명은 졸업을 하고 나서도 FES 사역에 아직 참여하고 있다. 많은 캄보디아 대학생들이 부와 지위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섬기기 위해서 이기적인 야심을 버린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캄보디아 FES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당하려고 하는 캄보디아 졸업생들과 학생들이 필요하다.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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