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외줄타기의 즐거움
양희송 "복음과 상황" 편집장
1. 간결한 글
조선일보 김대중 전 주필을 놓고 누군가 평하기를,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를 직선이라고 하듯 그는 논지에 이르는 최단거리를 이어 가는 글을 쓴다고 했다. 김대중 씨의 글이 그러한지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으나, 좋은 글에 대한 특징을 참 잘 포착한 표현이란 생각은 했다. 간결성, 혹은 단도직입적 글쓰기, 할 말을 에둘러 가지 않고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글. 나는 그런 글이 좋다. 그런 글이 성실하고 정직하다.
간결하게 글을 쓰려면 우선 수식어를 줄여야 한다. 문장도 단문(simple sentence)형의 단순한 구조를 사용해야 한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야 한다. 이를테면, 가장 단순한 문장 구조에 빛나는 단어 몇 개를 박아 넣는 식이다. 그런 글이 사람을 울린다. 사정없이 사람을 때린다. 그런 글은 시(詩)에 가까운 운율과 논법을 지닌다. 김훈 같은 사람의 글에서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간결한 글을 쓰려면 생각의 핵심을 짚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간절한 질문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가방 끈이 길어질수록 핵심을 회피하는 글쓰기의 테크닉이 늘어 간다. 도를 닦는 사람들은 선문답(禪問答)이란 걸 했다지 않은가. 생각이 깊어지면 말이 줄어드는 법이다. 역으로, 말수를 줄이면 생각이 깊어지는 것도 맞다. 핵심은 우리의 분주한 일상과 산만한 생활 습관 속에서 어떻게 단순한 삶을, 단순한 생각을, 단순한 말을 지켜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2. 주장과 정보의 균형
“복음과 상황”은 1999년부터 편집 위원으로 이름을 걸어 놓고 있었고, 2004년에는 편집장 노릇을 했다. 책머리에 ‘편집장의 글’을 쓰는 재미가 적지 않았는데, 그 첫 호에 이렇게 썼다. “주장과 정보의 균형을 이루겠다.” 1990년대 중반에 작은 회보를 내면서 다짐한 원칙이었다. 주장만 강한 글은 가슴은 있으나 머리가 없어 보였고, 정보만 있는 글은 머리는 큰데 가슴은 비어 보였다.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한다면 ‘정보’는 재료이고, ‘주장’은 요리법이라고 볼 수 있다. 좋은 재료를 써야 기본적으로 좋은 요리가 나온다. 그러나 좋은 요리는 그런 재료들의 단순한 합(合)이 아니다. 요리사 특유의 손맛과 비장의 양념 혹은 조리 방법이, 그 요리에 다른 모든 음식과 구별되는 특별함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는 새로운 실험도 많이 해야 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양을 써 보는 숙련의 과정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 역시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체를 흉내 내 보기도 했고, 마감 시간에 몰려 많은 양의 원고를 기계처럼 써 본 경험도 있는데, 이런 과정이 다 도움이 되었다.
정보를 습득하고, 주장을 다듬는 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부지런한 독서가여야 한다. 한양대 정민 교수가 쓴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푸른역사)에 보면, 김득신이란 사람의 “독수기”(讀數記)란 글이 소개되어 있다. 당대에 소문난 둔재였던 김득신은 자신이 1만 번 이상 읽은 책만 기록에 남겨 놓았는데, 그 내용의 일부가 이렇다.
“「백이전」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 「분왕」, 「벽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은 2만 번 읽었다. 「제책」, 「귀신장」, 「목가산기」, 「제구양문」, 「중용서」는 1만 8천 번, 「송설존의서」, 「송수재서」, 「백리해장」은 1만 5천 번…. (1만 번 이상 읽은 책은) 모두 36편이다.…갑술년(1634)부터 경술년(1670) 사이에 「장자」와 「사기」, 「대학」과 「중용」은 많이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읽은 횟수가 만 번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독수기」에 싣지 않았다. 만약 뒤의 자손이 내 「독수기」를 보게 되면, 내가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정민 교수는 김득신이 나중에는 문장(文章)으로 조선 후기에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다고 소개한다.
요즘 대학생들의 보고서를 보면 웬만한 정보는 모두 인터넷 검색 사이트의 ‘지식 검색’을 인용하고 있다. 개념의 정의나 해당 사례, 통계 등을 다 그렇게 처리한다. 홍세화씨는 “무식한 요즘 대학생들”이란 글을 써서 요즘 세태를 꼬집은 적이 있다. “옛날에는 책을 읽지 않으면 자신이 무식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다 보니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인용하는 정보의 양에 질리곤 하지만, 그 정보를 요리하는 손놀림이 무디고 안목이 처지는 것을 보면 그들이 정보의 바다에서 하염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에서 ‘서핑’(surfing)하는 게 아니라, 빠져 죽는 경우가 생기겠다는 우려인 셈이다.
3. 쾌락을 추구하는 글쓰기
왜 글을 쓰냐고 물으면, 짐짓 심각한 이유를 댄다. 그러나 마음 바닥을 자세히 뒤져 보면 글쓰기로 인한 쾌감이 거기에 있다. 인터넷 공간의 댓글 문화를 들여다보면 그런 속 깊은 욕망이 비교적 정직하게 드러나 있다. 익명성에 기대어 맘껏 분출해 보는 것이다. 나는 그 쾌감을 억누르기보다는 적절한 방식으로 존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지적 욕구 혹은 표현의 욕구가 결코 인간의 기본적 욕망, 즉 식욕이나 성욕보다 덜 절박하지 않다.
진리에 대한 추구나 헌신할 만한 가치를 탐구하는 것은 결코 쾌락과 배치되지 않는다. 성경은 계시(revelation)를 ‘숨겨진 것이 드러남’(apocalypso)으로 이해한다. 신약이나 구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인간의 경험적 지식이나 예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초월의 경험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이 계시의 순간을,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도 말하고, 기절하거나 환상을 보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강렬한 희열의 경험인 것이다. 그것은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혹은 그분의 임재를 강렬하게 체험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통한 소통의 체험은 우리 신체나 관계의 확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가 공동체적 소통의 경험을 극대화하는 한 방편이라고 믿는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는 가장 적극적인 신앙 행위의 하나로 그 역할을 다한다. 나는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던 와중에 ‘내러티브(narrative) 구조’를 통해 세계관 이야기를 더 쉽고 명확하게 개념화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세계관(worldview)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이야기(narrative)이며, 그것은 추상화(abstractization), 개념화(conceptualization)의 방법보다 이야기됨으로써(being narrated)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는 주장이다. 즉 다른 말로 설명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God narrated = the Scriptures)을 통해‘말씀되신 하나님’(God was narrated = the incarnation)을 만나고, 오늘날에도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is narrating = the Spirit)을 통해 그 이야기를 우리가 새롭게 하는 것(re-narrate)이다.
4. 글쓰기를 위해서
매체에 글을 적극 투고하라. 대학 3학년 때였던가, “신앙계”란 잡지에 글을 청탁받아 실은 적이 있다. 묘한 기분이었다. 내 이름을 달고,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잡지에 실리는 기분. 영국에서 유학할 때에도 스스로의 삶에 리듬감과 긴장감을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복음과 상황”에 연재글을 썼다. 그런데, 가끔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글을 읽었다는 사람을 만난다. 어떤 글들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인터넷에 글쓰기는 종종 예기치 못한 논쟁으로 비화되곤 한다. 책임지는 글에 대한 요청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어떤 경우는 자신을 내비치는 글이 요구될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는 정말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매우 잘 계산된 방어적 글쓰기를 하게 될 때도 있다. 두세 합을 주고받을 각오를 하고, 논점의 강약을 조절하며 논쟁을 이끌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글쓰기는 마치 이종 격투기와 같다. 자기 조절과 논리 계발이 피를 말리는 경우다. 그런 글을 쓰면서 세상을 배우고, 인생을 실감한다.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몸에다 삶을 새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는 글쓰기가 바로 바디 피어싱(body piercing)이고, 문신(tattoo)이다. 어떤 흔적을 몸에 남기고들 사는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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