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1) 시쓰기 수업
1999년 봄 정현종 교수님의 시쓰기 수업. 기형도의 이름을 나는 강의실에서 처음 들었다. '회벽 위 못자국' 이란 한 철학과 선배의 시가 기억이 난다. 선배는 강단 위에 두 번 서서 자기의 시를 변호했는데 한 번은 자신이 시쓰는 과정을 이야기하며 윤동주와 기형도의 영향을 깊이 받았노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번은 자기 고백적으로 자신의 시쓰기는 단지 감정과 사상의 배설에 불과했노라고 강의실을 숙연하게 만들었었다. 나는 정현종 교수님을 깊이 존경하지 않았다. 그의 시가 감동을 주지도 않았다. 젊은 시절의 고민을 정당하게 무게 달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기형도 학생이 학부시절 여름철 무성한 나무를 보며 그 잎사귀가 빈 가지를 감추고 있는 것을, 죽음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 말한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그렇게 스쳐 지난 이름을. 몇 번 감동없이 펴보다 덮은 시집 생각이 나서 이번에 진주를 내려가는 길에 동행했다.
(2) 유년시절의 기억
"영하의 바람". 연세 춘추 '박영준 문학상' 에 가작으로 입선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짧은 단편이 인상이 깊었다.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두 아이의 시선에 몇 알지 못하는 상암동의 아이들이 생각이 자꾸 났다. 시인의 유년시절 경험이 녹아 있음을 그의 연표를 보고 알았다. 1969년 그의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얼마 안 되는 전답이 약값으로 남의 손에 넘기우고 생계에 뛰어드신 어머니. 1975년 바로 위 누이마저 불의의 사고로 잃었던 경험은 고스란히 그의 정서와 영혼에 깊은 흔적이 되었으리라. "위험한 가계 1969" 와 "엄마 걱정"이란 시는 그래서 더욱 내게 다가왔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둔 이불을 등을 기댄 채 큰 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깍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 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에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우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지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리시려고.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선 석유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바라기 씨앗 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서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3) 두려움과 사랑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 詩作 메모 (1988.11)
이전처럼 책을 덮어 버렸다. 덮고 버렸다. 더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개"를 읽으며 떠올린 시대의 공포와 죄악을. 그의 무료한 사색과 피곤한 고민이 종이 위에 떨구어졌을 "흔해빠진 독서" 나 "오래된 서적"이나. 그가 우두커니 보고 있었을 "우리 동네 목사님" 이나. 황지우의 고백처럼 무서운 사막을 안고 있어 사랑하지 못한 "빈집"이나. 감정은 위험하다. 시를 읽을 때마다 발을 담그기가 두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시를 써보고 싶다가도 자꾸 얼굴을 돌린다. 무수한 구절들이 얼마나 의미 없을 때가 많은지. 기형도의 시는 마음을 울린다. 부분적인 진실과 전체적인 진실. 이 둘이 다름을 늘 상기해야 하는 것은 그의 시의 진실이 가장 귀한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리다. 얼마나 많은 공허 속에서 심야 영화관 한 구석 자리에서 그렇게 쓰려졌을까. 건강한 영혼이 고침을 받고 은혜로 시가 손에 다시 돌려졌으면 좋겠다. 찬양. 깨어진 세상에서 부르는 노래. 인생을 몸소 아시는 그 분의 은혜. 그 분이 온전히 다스릴 나라. 회복되어질 영혼. 그 분의 창조하신 뜻대로 그 분을 알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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