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호우잉(신영복 옮김)/ 다섯수레 출판
1.
1957년 “반 우파 투쟁” , 1966년 “문화혁명”. 계급투쟁과 노선투쟁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던 작가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믿음은 ‘4인방’을 폭로하는 투쟁 속에 빛을 잃고 흔들리게 되었다. 정직한 씨름을 거쳐 그녀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쓰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지금까지 희극으로 비극의 역할을 연출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상의 자유를 탈취당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 정신의 족쇄를 아름다운 목걸이로 착각하고 자랑스레 내보이는 인간. 그리고 인생의 절반을 살아오면서도 자기를 모르고 자기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 그러한 인간의 역을 맡아 왔던 것이다.
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를 발견했다. 원래 나는 피와 살이 있고 사랑과 증오도 있으며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억압당하거나 ‘길들여진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커다란 문자가 갑자기 눈 앞에 떠올랐다. ‘인간!’ 오래 동안 버려지고 잊혀져 왔던 노래가 내 목을 뚫고 나왔다. 인간성, 인간의 감정, 휴머니즘!... 나는 나와 동류들을 향해서 내가 분명히 눈떴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기로 했다... “영혼이여, 돌아오라!”
2.
유물론이 소설 곳곳에 녹아있음을 보면서 작가가 어떻게 영혼이 돌아오기를 외칠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묻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간성의 회복을 이야기 할 수 있는지도. 막시즘과 유물론. 사상에 충실하면서 매일 실제의 경험을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 저자는 용기 있게 실제 곧 피와 감정이 살아있는 인간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신봉하던 사상-유물론에 철저한 인간 해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귀중한 발견이다. 그러나 피와 감정이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의 끝은 어디인가. 휴머니즘이 인간 본연의 실체를 다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갈등을 겪지 않았을까. 사상의 모순에서 또 한 번의 타협을 한 것은 아닐까.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p61) 호젠 후의 말을 빌린 작가의 생각으로부터 다른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3.
작가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자오 젠호안과 손 유에, 둘의 딸 손 한, 손 유에를 사랑한 호 젠후, 현실에 만족해 상처를 씻고 사는 리 이닝, 자신의 안위를 위해 현실과 타협한 시 류, 슈 홍종, 첸 유리, 요 뤄쇠. 투쟁에서 얻은 그들의 삶의 방식, 화자로는 등장하지 않는 혈기 넘치는 젊은 시 왕, 독특하게 현실 속에 있으면서 2인칭 관찰자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소설가 장 리차오.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나 10년을 유랑하며 살아야 했던 호 젠후의 귀향, 반대파에 몰려 갖은 수모를 당하고 있던 손 유에를 버리고 쾌락에 자신을 유기하여 새 아내를 맞은 자오 젠호안이 돌아와 용서를 구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이며 각 사람의 시선에서 동일한 이야기들을 엮어나가고 있다. 이런 형식을 ‘큐비즘‘이라 하는 것 같다. 작품에서 한한의 역할이 크다. 세 사람의 갈등 관계 속에서 한한이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혼한 부모 아래 자라며 투쟁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 소녀에게서 중국 지식인의 오늘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1980년 작품임을 고려할 때.
4.
중국 지식인들에게 유물론의 뿌리가 깊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지금 중국 대학생들에게도 그러할까. 이 가능성 많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5.
간추려 본 몇 개의 대화
“...그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는 봉건적인 관념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간부들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식의 이익을 위해서 인민에게 촉수를 뻗치고 나아가서는 법과 기강을 문란케 하며 인민의 이익을 저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상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잊어서는 곤란하네. 인민은 인민대로 별개의 가족 관계, 별개의 윤리 도덕을 만들어 내고 있어. 맹자에도 있어. ‘내 늙은이를 공경함으로써 그 마음을 남의 노인에까지 미치게 한다’...” (시 왕과 호 젠후)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전 인류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르크스는 말합니다. ‘무신론이 종교의 지양을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표현한 휴머니즘이라고 한다면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지양을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표현한 휴머니즘이다’ ‘무신론의 박애는 처음에는 아직 철학적,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공산주의의 박애는 처음부터 현실적이며 실제적 박애를 직접 추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휴머니즘과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 사이에 하나의 선을 긋고 있지만 휴머니즘과 박애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시 왕)
“나는 만족하다는 것을 알았지. 그러니까 행복해. 옛날에 내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안을 정도야. 생활이라는 것은 원래 그래야 되는거야. ... 텔레비젼을 사고 나면 다음에는 세탁기를 살 작정이야, 이싱은 내 몸이 약하니까 되도록 가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해. ... 생활이 계속 필요를 낳고, 물질의 필요가 조금씩 내 정신을 빼앗아, 마지막에는 정신을 대신해 버렸어. 욕망에는 제한이 없어. 그 하나하나가 분발의 목표가 되어 다른 것 따위는 생각할 틈도 없지. ...나는 생활의 전문가가 되어 살림을 꾸리는 연구를 하고 있는 거야. ... 인간,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리 이닝)
6.
문화대혁명에 대해 책을 더 읽어야겠다.
4인방(강 청, 장춘고. 배(?)문원, 왕공문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혁명의 실권파, 방은 방회라는 비밀조직체를 의미하며 1976년 9월 모택동 사망후 그들이 체포되고 난 뒤 경멸의 뜻으로 붙인 명칭)에 대해서도. 중국 현대사를 읽을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산주의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한한은 15세가 되자 당에 입당을 하게 되는데 등장한 어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7.
문학형식에서 내가 새로웠던 부분은 작가도 말했듯이. (큐비즘은 난․쏘에서도 보았던 형식이라 특별하지는 않았다.) 꿈을 기술한 부분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추상적인 표현 방법은 보다 정확하고 보다 경제적으로 어떤 종류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개의 꿈, 즉 손 유에의 꿈, 자오 젠호안의 꿈, 요 뤄쇠의 꿈을 묘사했다. 그 꿈은 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꿈에서 표현한 내용은 깊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같은 내용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더라면 역시 상당히 정력을 소비하고 또 문자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8.
신형기 교수님의 현대 문학 비평 수업이 생각이 났다. 사실은 문예 비평 수업이었으며 1920,30년대 한국 지식인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것들이 바로 이러한 노선 투쟁들이었다. 교재를 후에 다시 읽으며 이 시대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9.
한 가지 더 놀란 점은 역주이다. 주인공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어구를 맹자와 시경 등 중국 고전에서 찾아 인용해 놓은 것들과 작품에서 소개하는 여러 문학 작품에 대해 소소히 알고 각주를 달아 놓은 것이 역자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10.
작가( 다이 호우잉(1938~ ) ) 의 또 다른 작품들.
<시인의 죽음(詩人之死)>, <하늘의 발자국소리(空中的足音)>, <부드러운 사슬>
당대의 중국 대륙 지식인의 운명을 표현한 삼부작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은 없고 호 젠후가 유랑 중 두 권의 책만 챙겼다고 했는데 마르크스 엥겔스 평전 외 홍루몽을 읽고 싶다.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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