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티 윌콕스 노블, 『매티 노블의 조선회상』, 좋은 씨앗, 2010
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Noble, 1892-1934
그들은 오늘로써 과거에 숭배했던 모든 신들과 술장사와도 결별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난 부인에게 이제까지 숭배하고 제물을 바친 혼령이 몇이나 되냐고 물었다. 부인은 돈과 양식과 옷을 제물로 바친 온령이 열넷이 넘는다고 했다. 한 방에는 선반 위에 여러 악령에게 제사 지낼 용도로 지은 옷이 가득한 바구니가 세 개 있었다.
- ㅋ에도 수없이 많은 제단들이 있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이들과 결별하도록 영적 싸움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사단이 주는 것들을 토해내고 끊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후기 사역은 모두 명확히 초점을 맞추어야겠다.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을 갖추려 분요하지 말자.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시다.
1893년 5월 에스더의 약혼
소녀 에스더가 약혼한다. 약혼하는 사람은 우리의 피고용인이다. 그는 닥터 제임스홀이 평양에 갔을 때 그의 마부였는데, 몇 달간 일을 시켜 보니 사람 됨됨이가 좋았다. 소년은 이제 마부 일을 그만두고 우리를 위해 일하며 학교에 다니면서 한글, 한문, 영어를 공부한다.
1893년 11월 10일 셔우드 출생
오늘 아침 10시에 9파운드 (4킬로그램) 아기가 태어나 홀 박사 부부 가정에 식구가 하나 늘었다. 아들의 이름은 셔우드. 홀 부인의 처녀 때 이름이다. 모두 건강하다.
1893년 5월 31일, 양화진 묘지
어제 강가에 버티 올링거의 시신이 안장되었다… 버티는 올링거 목사 부부의 둘째 아들이며 나이는 12살 정도 됐다. 2주간 버티와 여동생 윌라는 (편도선염을) 심하게 앓았으며 버티는 죽을 때까지 의식이 있어 사람들에게 말을 했다. 여동생도 상태가 안 좋아 오빠의 죽음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여기 묻힌 외국인은 1890년 소천한 장로교 선교사 존 헤론밖에 없다. 남자들은 무덤까지 모두 걸어갔다. 여자들은 가마꾼들이 끄는 가마를 타고 갔다. 관은 홀 박사가 만든 운구에 실려 가마꾼들이 끌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의 장례식 설교 본문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백합화를 꺾는구나” 였다.
1893년 6월 3일 어린 윌라에게 오빠 버티가 천국으로 말할 필요가 없게 됐다. 6월 1일 천사가 윌라를 데리러 왔다. 오늘 윌라는 강가 버티 묘 옆에 묻혔다.
- 올링거 선교사는 중국에서 사역하다가 조선으로 와서 경험 있는 선교사로서 많은 젊은 사역자들을 도왔다. 열살이 넘은 두 자녀가 조선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노블은 올링거 부인의 모습을 묘사한다. 양화진 언덕에서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사랑하는 자녀와 남편을 묻으며 눈물을 흘렸을까. 그들이 바라보았던 한강이 저너머 오늘도 흐르고 있다. 서로를 눈물로 붙잡아 주었던 초기 선교사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1894년 11월 26일
홀 박사는 11월 24일 토요일 저녁 6시 15분 영문을 빠져 나갔다. 아침 일찍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금요일까지는 의식이 있었지만 말은 못했다. 목소리를 완전히 잃기 전, 끊어지는 문장으로 아더에게 말하길, 자신은 살지 못할 거라며, 어린 양의 피로 씻긴 문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장티푸스 열병을 앓았기 때문에 전염될까봐 문병은 허락되지 않았다. 시신은 어제 매장되었다. 외국인 대다수와 많은 조선인이 강가 묘지에 갔다. 아더가 매장지에서 예배를 인도했고, 닥터 윌리엄 스크랜턴이 연주했다. 일주일 후 아더의 책임 하에 추모 예배가 있을 것이다… 이제 강둑엔 8기의 무덤이 있다. 6기의 무덤이 1년 반안에 생겼다.
1898년 5월 12일, 에디스의 이질
5월 2일 로제타 홀 부인과 아이들 셔우드와 에디스가 평양에 도착했다. 집이 완공될 때까지 우리 집에 묵기로 했다. 홀 가족은 배에서 설사병을 앓았다… 어린 에디스는 이질을 심하게 앓고 있다. 이렇게 아픈 경우는 처음 본다. 아더가 에디스를 지켜 보고 있다… 루스와 셔우드는 밖에서 재밌게 놀고 있다. 우리 아기 메이가 설사에 걸려 상태가 좋지 않다. 모두 잘 되리라 믿는다. 조선인들은 홀 부인을 다시 보게 되어 행복해 한다.
- 로제타 홀이 남편의 죽음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출산 이후 다시 돌아왔을 때 노블 선교사가 남긴 기록인 것 같다. 에디스의 죽음이 안타깝고 그리고 노블 선교사의 딸 메이의 죽음이 안타깝다. 선교사들이 자녀들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드린 희생이 크다.
1989년 8월, 메이의 죽음
그렇다. 마지막 문장은 사실이다. 8월 18일 목요일 밤 9시경 천사들이 왔다. 이틀 반 동안 아기 메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구체적인 사항은 메이의 일지에 적어 놓았다. 약 5일 전 이틀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새 이가 7개 났고 8번째 이가 나오고 있었다. 장례식 후 홀 부인이 와서 서울로 가라고 재촉했다… 아더가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 루스와 나를 두고 갈 순 없었다.
1896년 11월 27일, 최초의 여학교
11월 26일은 평양에 여성과 소녀들에게 언문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가 설립된 날로 기억될 것이다. 9명의 여성이 모였고 그 중 2명은 가르치고 나머지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읽기를 배울 것이다. 우리의 이곳 여성 사역에서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리라 기대한다.
우리 가족이 서울을 떠나기 전 막내 아들 시릴이 설사를 앓았습니다. 평양에 도착하면서 모두 이질에 걸렸고 시릴만 빼고는 완쾌되었습니다. 두 달간 아이의 머리맡을 지켰습니다. 계속 마르더니 새 집으로 이사한 다음 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아이가 숨을 거둘 때 엄마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혼자였습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모두 연례회 참석차 서울에 가 있었습니다. 우리와 한 집에 사는 팔웰 박사는 어려울 때 진실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1907년 1월 2일
성령이 강한 권능으로 평양 교회들과 여러 다른 지역에 임하였다. 그 결과 지난 겨울 웨일즈 지방의 대부흥에 관해 읽은 내용과 흡사한, 위대하고 영광스런 흥분 상태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통회하고 죄를 자백했으며, 암흑의 이교도 가운데 행해진 인간의 연약함이 유례없이 그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 장로교에선 이렇게 죄가 밝히 드러나는 역사가 남성도들 가운데 먼저 시작되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기독교인들은 수개월간 성령을 부어 주시길 기도하고 있었다.
1907년 2월 11일
어제 아침 우리 교회에서 죄의 큰 자백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신앙적인 가르침에 점점 민감해졌고 죄로 심령이 쪼개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우리의 현지인 목사는 장로교회에 나타난 이 현상이 감당하기에 벅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과연 성령의 역사하심인지 의문을 가졌다… 아더는 돌아왔고 이 곳에 임한 성령의 권능을 느꼈다. 그가 주일 오전 예배를 열자마자 사람들은 죄를 자백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우린 부흥의 불길의 와중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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