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희, 『길따라 믿음따라』, 두란노서원, 1990
셔우드 홀은 공부하는 동안 조선땅에서 할 일을 여러 가지 계획했고 그 중에 가장 큰 일이 결핵 요양원을 세우는 일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2년만에 그는 숙원의 사업을 시작했다. 조선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 요양원을 건립하고 요양원 안에 결핵위생학교까지 설립했다. 1928년 일이었다. (46)
1940년 8월 일본은 그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연행했다... 엉터리 없는 재판을 거쳐, 3개월 징역이나 일천달러 (당시 오천앵) 벌금형이 떨어졌다... 천신만고를 다 한 위에 벌금 일천달러가 채워진 것은 기적이었다. 1940년 10월 9일... 맨손이 된 셔우드 일가는 한국 땅에 남고 싶어도 남을 수가 없었다... 닥터 셔우드는 아버지가 묻혀 있는 땅, 그의 영혼에 한송이 꽃으로 영원히 되어 있는 여동생 에디스가 묻혀 있는 땅, 그리고 아들(프랭크)이 묻혀 있는 땅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49)
'비록 이 땅이 지금은 일본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으나 이것은 이 땅이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의 밭이 되게 하시기 위한 연단이다. 이 민족은 반드시 자유를 찾게 될 것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다운 민족의 면모를 갖출 것이다...' (50)
"우리가 은퇴한 것이 1963년이었지요. 귀국하는 길에 한국엘 들러 양화진을 찾아갔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에디스 그리고 우리의 아들이 묻혀 있는 언덕에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회상에 젖었었습니다. 어머니는 한국동란이 일어난 다음해 1951년 4월 5일, 몸을 담고 계시던 양로원에서 독감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시다가 감염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유언대로 화장하여 양화진에 모셨지요." (55)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것이로다.' 그러한 비문이 새겨진 비석에는 셔우드의 추생연도가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다. 이제 셔우드 홀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이 곳에 와서 묻히게 되는 것이다. 21년만에 (1984년 11월) 한국 나들이를 하면서 양화진 언덕엘 올라간 그의 심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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