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12
스탠리 그렌츠, 『신학으로의 초대』, 이영훈 역, 서울:IVP,1996
신학으로의 초대 (Who needs theology?) /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 IVP
몇 해전 이 위대한 신학자의 타계 소식을 접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에도 나는 그의 이름만 알았을 뿐인지 그의 신학의 일부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입문 서적을 읽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탠리 그렌츠 - 제자도에 있어서 신학이 얼마나 절실한지 호소하고 있는 본서에서 나는 그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초적인 물음에서부터 신학을 소개하고 있는 저자의 따뜻한 배려는- 때때로 논의가 너무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을지라도- 신학이 더 이상 현학적인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깨닫고 표현해야 할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진리임을 온 마음으로 배우게 하고 있었다.
신학의 정의
저자는 ‘기독교 신학‘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유하고 있는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성찰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것” (p44)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전 존재와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 행해진다.”(p56) 나는 그의 시원한 정의가 마음에 들었다. 회심에서 끝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바른 신학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제자도를 온전케 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수록, 그 분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더 많이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p52)
신학의 과제
신학에 대한 변호 (20세기 고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의 진보 예시) 에 이어 저자는 신학의 과제를 두 가지로 명확하게 정의 내리고 있었다.
A. 비판적 과제
1. 기독교 신념들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
2. 타당한 기독교 신념들을 도그마, 교리, 의견으로 분류하는 일
B. 건설적 과제
1. 다양한 성경적 가르침을 통합된 모델로 구축하는 일
- 하나님, 우리 자신, 세상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일되고 일관성이 있도록 제시하는 것
2. 이 모델을 현대 문화에 적실성 있게 관련시키는 일
신학은 신념들을 고안해 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들을 발견하여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영지주의에대항했던 신약의 저자들과 클레멘트, 이레니우스의 비판적 노력을 예로 들고 있다. 계속해서 도그마, 교리, 의견에 대한 구분과 설명이 있는데각 교단을 구분 짓게 된 신념의 범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구세주이시다” 라는 단 하나의 도그마를 보편적 일치 사항으로 택한 20세기 WCC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와 같은 신학의 범주에서 조명할 수 있음이 새롭게 느껴졌다. 신학의 건설적 과제는 신학의 상황화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앞으로 많은 고민이 필요한 도전임을 상기시켰다.
신학의 전통들
상세하게 읽을 부분이었다. 교회사와 함께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의 주요 역사적인 신학적 전통 네 가지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었다. -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최종적 분열 이후 서로 다른 양식의 신학을 산출한 (1) 동방정교회(신비주의, 영성안에 신학을 흡수)와 (2) 로마 가톨릭(자연신학의 강조, 종교회의를 통한 도그마와 교리의 선언-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21회 종교회의 -도그마와 교리들을 현대문화에 관련시키고 개신교 교리와 양립할 수 있도록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 (3) 16세기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개신교 신학(루터주의,개혁교회-츠빙글리, 칼빈, 크랜머, 재세례파-시몬스: 전통을 성경의 증거와 동일시 하는 것을 거부, 신뢰할 만한 인도자로서의 자연신학 거부,모든 신자의 성경 해석 권리, 신학적 성찰의 전진성을 긍정) 이 주요 세 분파를 이루며 중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것에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4) 19세기 현대주의로 이름한 자유주의 신학은 전통적 신념을 평가하여 거부하는 비판적 과제에 집중하고 교리를 수정하여현대 문화의 구미에 맞도록 적응시키고자 했다. 신학의 건설적 과제에서 현대 문화에 관련시키되 현대 문화에의 적실성을 우선적인 규범으로하여 기독교 신념들을 재건설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전통 교리들을 의견의 범주로 몰아 넣음으로써 어떤 인본주의자들도 시인할 수 있는최소한의 도덕적인 개념만이 교리로 남게 된다.
대학 시절 채플을 담당하던 교목의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안타까움도 지쳐 그 자리를 성의 없게 앉아 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유주의 신학의 비판은 더 자세히 공부해야 할 것 같다. 리처드 니버의 자유주의 신학 비판이 읽을 만하겠다. 그는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없는 인간을 심판이 배제된 나라로 이끈 것’이 된다고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개신교에서는 근본주의와 보수주의 신학이 발흥하게 되는데 신학의 비판적 과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의 견의 범주에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은 채 대부분 도그마적인 신앙의 강조와 반복에 그치고 있어 많은 한계들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경험한 신앙의 대다수도 이에속하지 않았는가 싶다.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신정통주의, 카넬과 버나드 램과 칼 헨리의 신복음주의,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적 신학이 이후 대안으로등장한 신학이고 운동이었는데 20세기 신학의 흐름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신학자의 도구
성경메시지, 교회의 유산, 현대 문화의 사고 형태 - 저자는 신학의 건설을 위한 자료와 규범이라는 적절한 도구로 이와 같은 세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상황 속에 놓인 삶의 모든 제한 속에서 신학을 추구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제한성이 궁극적으로 신학을 수행하게 하고 신학에풍성함을 더해 주는 것이 된다.”
상황 속에서 건설하는 신학
신학은 성경적으로 건설되어야 하며 성경적 진리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둘 중 어느 곳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질문이 뒤따르는데- 성경에 대한 이해, 유산에 대한 인식, 문화적 상황에 대한 해석이 창조적으로 상호 작용할 때 상황에 맞는 신학을 건설할 수 있다. (속죄 교리의 역사)
통합적인 주제
신학은 통합적인 주제(integrative motif)에 의해 조직화된다. 통합적인 주제는 여러 가지 교리를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는 열쇠다. 이 중요한 주제는 신학자가 토론하는 문제에 초점을 제공하고 그가 그 문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조명한다. (루터의 ‘이신칭의’, 칼빈의 ‘하나님의 영광’, ‘해방’, ‘여성의 경험’, ‘이야기’, ‘하나님의 나라’ 등) 통합적인 주제는 그것에 비추어서 신학자가 다른 모든 신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상대적인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주제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다. 또한 그것은 성경, 유산, 문화를 연결하는 신학적 교량 역할을 한다. 참으로 유용한 중심 주제는 성경 메시지의 본질을 포착한다. 동시에 그것은 현대 문화의 정서를 파악하여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의 욕구를 드러낸다. (p129)
요새 내러티브 신학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현대 신학에서의 통합 주제로 이해할 수 있겠다. 특히 “하나님 나라” 개념이 중요한 통합 주제로 부각되는데 이것이 언제부터 신학의 현대 사조를 대변하기 시작했으며 나와 공동체의 중심 가치가 되었는지 - 그 발전 과정을 찾아보아야겠다.
신학을 삶에 적용함
저자는 우리를 감동적인 결론부로 이끌고 있다. “좋은 신학은 이론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삶에 영향을 미친다.” 몇가지 주요한 통찰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신학과 삶은 서로 의존한다.” - 해석구조가 항상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하는 반문에 저자는 그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곧바로 경험과 해석구조는 상호의존적임을 재언급하며 (세계관이 경험을 산출하며 경험이 세계관을 재평가하고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우리 삶이 형성시킨 해석구조가 근본적인 신앙 체계를 포함하고 있고 기본적 신학의 구성 요소가 됨을 확인시킨다. “신학적인 시각으로 개인의 삶을 조망해야 한다.” -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 신학적 시각으로 자신을고찰하는 것은 삶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근본적인 확신대로 사는 것,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으로의 초대
어떤 수준에서든지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 - 다른 무엇이 아닌, 말씀속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예배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는 삶을 드리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대체할 수 없는 지금의예배와 공동체 경험의 소중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내가 현재 이해하는 신학 수준에 불만족해야 함을 역설한다. 하나님과 나, 세계에 대해 성숙한 사고를 하고자 힘쓰며, 복음에 비추어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깊은 신앙으로 자라기를 기도해야 한다. 신학적 성찰을 혼자서 하지는 말라는 권고가 빠지지 않는다.
저자는 내게 마지막 주제를 던지고 떠난다. 나의 통합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어떤 단일 주제가 성경적인 기독교의 다양한 모든 요소를 통합시키는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주권, 종말론, 창조, 언약, 공동체 등- 저자는 공동체를 유력한현대적 통합 주제로 변호한다) 내가 주장하는 믿음의 내용들은 전부 어디서 만나는가? 그것 없이는 그 밖의 모든 것이 파괴될 정도로 중요하고 포괄적인가? 더불어 성경과 교회의 신학적 유산과 현대 문화에 대한 객관적 시각(Synoptic vision)을 발전시킬 것을 권고한다. 신학적인 자료와 정보에 친숙해지는 것 외에 연결성, 유형, 중요성의 차이를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나의 제자도의 여정에 신학을 친구삼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부터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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